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쉴레이만 1세 (문단 편집) ==== 지중해 패권 차지 ==== [[파일:suleiman.karl.jpg|width=660]] 1530년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의 그림. 왼쪽의 인물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다. >하늘이 이토록 이슬람을 향해 눈에 띄게 환히 비춰주고 있는데, 이슬람의 위대함에 어찌 그 한계가 있겠는가? 이제 땅과 바다가 모두 술탄에게 굴복하였다. 모넴바시아와 나브플리오를 내어주고 암울해진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부족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도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적을 찾으려 애쓰는 프랑스는 오스만 측에 은밀히 군사 지원을 해주었고, 부다에서는 오스만 깃발이 휘날렸다. 비록 육지에서는 합스부르크의 아성을 꺾을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오스만 제국]]은 강대했고 쉴레이만 1세의 야심은 강했다. 오스만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역시 오스만 제국의 영지를 어찌 할 입장은 아니었고, 이미 [[동유럽]]의 지배권은 안정되었다. 다음으로 쉴레이만이 노린 것은 [[지중해]]의 패권이었다. 프랑스와 연합하여 이탈리아의 합스부르크 세력을 남북으로 협공하는 것이 오스만 제국의 최종 목적이었다. 당시 지중해는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가 에게 해의 섬들을 차지해 해상 제국을 영위하고 있었고 합스부르크 왕가 역시 [[밀라노 공국]]이나 [[트리에스테]] 등을 기반으로 지중해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황제 [[카를 5세]]는 [[유럽]]과 [[아메리카]]는 물론이고 [[이사벨 1세|외]][[페르난도 2세|가]]의 정복 사업을 이어받아 [[북아프리카]]에도 발을 뻗치고 있었다. 이는 [[이집트]]를 넘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려는 오스만 제국에 있어서는 도전이자 응전이었다. 그러나 1535년 [[튀니지]]에서 술탄 측의 군대는 합스부르크 카를 5세의 원정군과 맞붙었다가 깨졌다. 이 패배로 튀니지 일부가 합스부르크 관할로 넘어가 버렸지만 쉴레이만은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538년, [[교황령]]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주축으로 결성된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함대의 일전이 있었다. 지중해의 패권을 다투기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이 [[프레베자 해전]]에서 오스만은 대승을 거두고 마침내 지중해 패권을 얻는데 성공한다. 비록 튀니지는 쉴레이만이 죽을 때까지도 스페인 땅이었지만, 아무튼 여세를 몰아 오스만의 군대는 북아프리카로 계속 진출해 [[알제리]]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영역은 빈 포위의 실패로 체념한 서유럽을 제외하면 예전 [[로마 제국]]과 거의 일치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